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시놉시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는 광해/하선 1 인 2역을 연기한 배우 이병헌, 허균을 연기한 배우 류승룡, 중전을 연기한 배우 한효주가 주연으로 등장한다. 이 영화는 광해군 치세기 당시 실존 인물을 빌려와 승정원일기에서 지원진 15일간의 빈 시간 사이에 광해군으로 위장한 대역이 조선을 다스렸다고 가정한 픽션영화이다. 왕위를 둘러싼 권력 다툼과 당쟁으로 혼란이 극에 달한 광해군 8년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에 대한 분노와 두려움으로 점점 난폭해져 가던 왕 광해는 도승지 허균에게 자신을 대신하여 위협에 노출할 수 있는 대역을 찾으라 지신한다. 이에 허균은 취객들 사이에 만담으로 인기를 끌던 하선을 발견 왕과 똑같은 외모는 물론 타고난 재주와 말솜씨로 왕의 흉내도 완벽하게 하는 하선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간 하선은 가슴 조이며 왕의 대역을 한다. 그러던 중 광해군이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사건이 발생 허균은 광해군이 치료를 받는 동안 하선에게 광해군을 대신해 왕의 대역을 할 것을 명한다. 만담꾼에서 하루아침에 조선의 왕이 되어버린 천민 하선 허균의 지시 하에 말투부터 걸음걸이 국정을 다스리는 법까지 함부로 입을 놀려서도 안 되는 위험천만한 왕노릇을 시작하게 된다. 예민하고 난폭한 광해와는 달리 따뜻하고 인간미가 느껴지는 왕의 모습에 궁정이 조금씩 술렁이게 되고 점점 왕의 대역이 아닌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하선 그 모습에 허균도 당황을 하며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평가
CJ는 애초부터 광해 100만 시사회 개최를 운운하며 대대적인 물량 공세를 계획했으나 실제로는 1만여 명이었다. 시사회에서부터 영화가 잘 나왔다는 반응이 상당수였으며, 시사회 직후 평론가들도 일제히 호평을 내놓았다. 주인공 이병헌의 1인 2역 연기는 한국 영화 역사상 최고의 연기 중 하나로 꼽힌다. 훌륭한 내면 연기를 선보였고 성격과 생활상이 극명하게 구분이 되기 때문에 더 확연하게 구분이 되는 것 이 특징 하선이 점점 왕으로 변해가는 과정까지 연기해야 하는 어려운 연기였는데 완벽하게 소화했다. 광해는 줄거리나 영상미가 작품성 자체로도 호평이 우세하다. 영화를 관람한 관객들로부터 호의적인 평가와 입소문이 이어졌으며, 주요 포털 영화란에서 관객평점 9점대를 받고 있다.(로튼 토마토 신선도 100%) 역사적으로 광해군의 이미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영화로 실제 역사와 유사한 광해군의 모습을 그대로 묘사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영화 자체는 광해군을 미화한 게 아니라 오히려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그의 업적이라는 것도 결국 가짜 광해군이 행한 것으로 치부해 비판하는 내용에 거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영화 설정 자체는 이미 비슷한 영화들이 많기에 신선하거나 하지는 않지만 영상미, 개연성 있는 줄거리 영화 자체로는 흠잡을 구석은 딱히 없으며 작품 초반부터 결말까지 억지스러운 전개가 없으며 한국 영화가 평가절하 되는 신파 부분마저 억지스럽지 않게 개연성 있는 부분으로 흘러가면서 많은 호평을 받아낼 수 있었다. 배우들의 연기력 또한 영화의 호평을 이끌어 낼 수 있었던 부분이다.
여담
기존에 알려진 결말 외에 미공개된 결말이 존재한다고 한다. 광대로 돌아간 하선이 저잣거리에서 궁궐에서 있었던 경험담을 공연을 하는 중 궁궐에 있어야 할 중전이 나타나서 서로 눈이 마주치는 장면 서로 마주 보면서 말없이 환하게 웃는 것으로 끝이 나는 결마이 하나 더 존재한다. 간혹 진짜 승정원일기에서 15일 분이 삭제된 거 아니냐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본작품의 무대인 17세기 중엽까지의 승정원일기는 소실되어 사라졌다고 한다. 선조 초기까지의 승정원일기는 임진왜란, 선조 중기부터 인조 즉위 직후까지의 승정원일기는 이괄의 난으로 인해 소실 작가의 전작에 사도세자 암살 미스터리 3일 같은 다른 가상역사물도 있는 만큼 줄거리가 상상에 기반한 허구라는 점을 감안하여야 한다. 요즘에는 왕정=절대왕권만을 생각할 수이지만 조선 사회는 절대왕정이 아닌, 왕과 신하들이 협의제에 가까운 체제를 유지하고 있으며 절대왕권을 휘두르는 왕은 폭군의 대명사로 불렸다. 차이점이 있다면 왕이 욕먹는 걸 감수하고 무작정 밀어붙이면 신료들이 마지못해 따르는 정도는 있지만 조선 초기에는 그런 것도 없이 목숨까지 걸고 왕을 막는 신하들도 있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사례로 세조를 끝까지 반대한 사육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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